지식인이 먼저 쇠창살을 깨부수자
-<황홀한 실종>을 읽고-
대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생겨나는 스펙트럼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현대의 작가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가장 첨예한 위기의 시대로 인식하는 듯 하다. 위기의 현재성 내지 영속성은 ‘세상에는 더 이상의 꿈이나, 희망, 유토피아가 없다’고 읽어낸다. 이제는 전쟁의 아픔을 잊어도 되는 때가 된 것일까. 아니면 과학문명의 진보가 낳는 심각한 폐해를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에서일까, 전쟁의 상흔을 그려내거나, 근대화 이후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된 삶에 천착하던 작가들의 시선이, 근래에 들어와서는 인간살이의 불구성에 초점화되기 시작했다.
이청준의 시선은 어느 순간 ‘개인의 진실과 사회적 진실이 어깨를 함께 할 수 있는가’에 멈추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정할 때 그것은 사회의 고정화된 틀에 희생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야겠다는 문제의식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다만 환부를 청진기나 메스가 아닌 문학을 통해 해결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황홀한 실종>에서 사용된 정신병은 그리 특이한 소재가 아니다. 인간을 관찰하는 각도를 달리한다면 그 누구도 정신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자기성찰의 기회를 부여하는 소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청준은 개인의 진실과 사회의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두 그룹으로 나눈다.
손박사에게 주어진 임무는 정신병 환자가 병원을 찾아오지 않고도 자신을 견딜 수 있게끔 치료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자신이 학습해온 이론에 기초해서 환자를 바라보는데 충실할 수밖에 없고, 그 본연의 자세가 지탄받을 일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의 증상과 그 증상을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심리까지도 논리적으로 증명, 해석, 설명하려 한다. 이는 그에게 있어 세상의 진실이 되며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진리로까지 확대된다. 대상을 정신병 환자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지 않는 틀은 자신이 영원히 안주하고 싶은 유토피아를 견고히 하는 것과 동시에 그 주위에 쇠창살을 치는 결과까지 낳는다.
윤일섭에 대한 손박사의 치료는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손박사와 사내의 대화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논쟁은 쇠창살의 존재와 사실의 진실성에 대한 생각이 각각 얼마나 철저하게 관념화되어 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사실의 확인만이 환자의 의식을 바로잡아 나갈 수 있다는 손박사의 믿음은 오류이기에, 진정한 치료의 부재를 낳았다. 결국 윤일섭은 실종을 원했고, 사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들어앉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와 안정도 영원할 수 없을 뿐더러, 사자와 구경꾼을 가르는 사자우리의 철책도 임의로 설치한 또 다른 쇠창살이 된다는 사실에 씁쓸해진다.
개인적 진실과 사회적 진실이 대결할 경우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는 격이 되기 쉽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사회가 개인의 진실을 짓눌러서는 안 된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도 선험적이거나 고정된 틀에 맞추어져서는 안 된다.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실종을 꿈꾸는 또 다른 윤일섭이 양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보편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지식인이 나서야 한다. 먼저 스스로 둘러친 쇠창살을 쳐부순다면 윤일섭의 병은 치료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상황에 놓여도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청준이 안내하는 유토피아로의 길에 서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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