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족을 통해 보는 전쟁의 상흔
- 이호철의 ‘닳아지는 살들’에 대한 분석 -
1.작가 소개
이호철(李浩哲1932 ~ )1)은 소설가로 함경남도 원산 출생이다. 6·25 때 월남하여 부산 미군부대 경비원 등을 거쳐 1955년에 「문학예술」에 체험적 단편 <탈향(脫鄕)>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자유실천문인협회 대표. 92년 예술원회원이 되었다. 전쟁과 민족분단의 비극을 형상화한 초기작품 <나상(裸像, 1957)>, <판문점(1961)>을 비롯, 사회의 부패, 정치적 모순 및 소시민적 삶을 신랄하게 묘사한 <닳아지는 살들(1962)> <부시장 부임지로 안 간다(1965)>, <울안과 울밖(1970)> <선임하사(1989)> 등의 시사 및 세태풍자 소설 등 폭넓은 소재의 작품을 써왔다. 동인 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그 밖의 작품에 소설집 <서울은 만원이다(1977)>, <무너앉는 소리(1989)>가 있으며, 수필집에 <명사십리 해당화야(1986)>, <마침내 통일절은 온다(1988)> 등이 있다. 1992년 청계연구소에서 <이호철전집>을 펴냈으며 2002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 1950년대(전후세대)2) 작가 분류
전후세대(1950년대)란 오영수, 김성한, 손창섭, 장용학, 한무숙, 유주현, 정한숙, 강신재, 박연희, 손소희 등 전쟁이전에 「예술조선」,「백민」,「신천지」,「문예」등으로 등단한 작가와, 전쟁이후「사상계」,「문학예술」,「현대문학」 및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호철, 김광식, 오상원, 서기원, 최상규, 하근찬, 박경리, 송병수, 선우휘, 이범선, 전광용, 강용준, 한말숙, 박경수, 오유권, 곽학송, 최인훈 등을 가리킨다. 전쟁이 끝나고「현대문학」,「문학예술」,「자유문학」등의 문예지를 무대로 본격적으로 펼쳐진 그들의 작품활동을 통해 비로소 전후 문학이 성립된다. 이 세대 작가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소년기를 보내면서 해방을 맞았고, 청춘을 전쟁 속에서 보낸 후 폐허의 터전에 새 삶을 가꿔야 했기에, 모든 가치개념이 붕괴되고 꿈과 이상이 상실되어 버린 현실을 때로는 거부의 몸짓으로, 때로는 비판의 눈길로, 때로는 자조의 탄식으로 갈등 속에 문학적 형상화의 길로 열어간 것이다.
3. 작품서지
이호철의 <닳아지는 살들>3)은 1962년 「사상계 109호」에 발표된 제 7회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다.
4. 줄거리
5월의 어느 저녁, 조용하고 썰렁한 응접실 소파위에 앉아 밤 열두 시에 돌아온다는 맏딸을 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은행에서 은퇴하고 지금은 반백치가 되어버린 늙은 주인, 그를 극진히 모시는 며느리 정애, 그리고 막내딸 영희다. ‘꽝당꽝당’ 어디서인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하자 영희는 억지로 지껄이며 선재가 아직 귀가하지 않았음을 상기한다. 이 층 구석방에 기거하는 선재는 열두 시에 돌아온다는 맏딸의 시사촌 동생으로, 영희와 약혼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피차 묵인된 사이다. 이북에 있는 맏딸이 열 두 시에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언제부터인가 모두가 막연하게 기다리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다. 파자마 차림으로 이 층에서 내려오는 아들 성식은 입을 열지 않고 서성대고, 열시가 되어 술로 엉망이 되어 귀가한 선재의 방에 들어간 영희는 그와 육체관계를 갖는다. 여전히 쇠 두드리는 소리가 투명하게 조급해진 듯 들려오고 시계가 드디어 열두 시를 칠 때, 여전히 맏딸을 기다리던 기족의 시선이 주인에게로 향한다. 이 때 복도의 문이 열리며 기묘한 웃음의 식모가 들어서고 발작이나 일으키듯 영희는 식모를 가리키며 언니가 돌아왔다고 소리친다. 주인은 한 손을 허공에다 대고 허우적거리고 성식과 정애도 일어선다. 꽝당꽝당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는 밤새 이어질 것이다.
5. 작품분석
5.1. 구성상의 특징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뚜렷한 서사적 사건의 전개가 없기에 내면의식의 흐름이 중심이 되고, 영희의 인물시점으로 그려진다. 공간적 배경 설정 측면에서, 서술되는 시간의 제약 측면에서, 인물 행동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사건 진행이 단일한 공간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20년간 돌아오지 않는 맏딸을 기다리는 한 가정을 무대로 한다. 분단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 맏딸을 매일 밤 가족이 기다린다는 설정은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다. 적막하고 답답한 응접실이라는 응축된 공간은 가족의 소통과 유대는 단절되고 과거에 대한 기억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맏딸을 ‘기다린다’는 동일한 관심사만이 가족간에 미약하게나마 연대의식을 느끼게 할 뿐이다.
결국 이렇게 그들은 누구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늙은 주인은 맏딸을, 정애는 아직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맏시누이를, 영희는 언니를, 성식은 누님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누구도 분명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의식은 없었다. 도대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저 모두가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이라도 없으면 한 집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살 명분이 없게 되는 셈이었다.4)
선재와 영희가 육체관계를 맺는 이층이라든지, 식모가 복도를 들락거리는 등 응접실을 벗어나는 장면도 있지만 작품 전체의 주된 공간은 응접실에 집약되어 있다.
둘째, 서술되는 시간의 제약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월의 어느 날 저녁’에서 시작하여 ‘밤 열두 시’까지로 설정되어 있다. 작품에서 나타난 시간과 공간의 세한성은 6·25전쟁을 겪고 황폐화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을 의미한다.
셋째, 공간적 제약과 시간적 제약의 필연적 결과로 작중 인물들은 서로 이탈하거나 분산하지 않은 채 무기력하게 묶여있을 뿐이다. 작중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역시 무기력하고 침체되어 있다. 반백치 상태인 아버지, 내면세계로 함몰한 아들, 체념으로 백치 상태를 보이는 며느리 등 이들에게서는 쇠붙이소리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나 적극적인 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영희만 아직은 이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상태로 설정한 작가는 영희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증폭시키고 있다.
5.2. 상징과 이해
시간적 배경이 되는 밤 12시는 인간의 깊은 무의식을, 귀멀고 반 백치인 늙은 주인은 현실과 단절된 모습을 상징한다. 이 작품의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적막하고 답답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소재는 응접실의 ‘출입문’이며 이 문은 두 개의 상황과 두 개의 공간을 의미한다.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된 세계에서는 ‘문’의 존재가치가 없다. 열릴 수 있음에도 닫혀 있는 문은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을 유추하게 한다. 집 안으로만 한정된 배경은 어떤 희망도 현실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암담한 현실을 상징한다. 작품 내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꽝당꽝당’ 쇠붙이소리는 작품전체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모티브가 된다. 이 쇠붙이 소리가 이 집안의 벽 틈서리를 쪼개고 결국 이 집안을 무너뜨릴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영희는 자신이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 소리는 여기서 행위의 주체이며, 작가가 설치한 끊임없이 이산의 심리를 각인시키는 긴장적 요소이며, 인간 정신에 상처를 줄 것이라는 암시적 요소이다. 또 영희가 식모를 보고 ‘정말 언니가 왔다’고 소리치는 것은 지루하고 무의미한 기다림을 그만 두자는 외침이며, 오랜 시간동안 기다림에 좌절된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의 감정을 나타낸다. 성식을 그릴 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안경알로만 인상을 그림으로써 그의 성격의 폐쇄성, 차가움, 냉정한 침묵 등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자상한 내력을 알 정도로 익숙하지도 않은 선재’와 육체관계를 갖는 영희의 심리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일탈로 해석할 수 있다. 무력함으로 가득 차고 이미 어긋나버린 이산가족관계를 깨트리고 싶기에, 일상성을 가진 선재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5.3. 반복
부사 ‘굉장히’를 세 번 반복해서 의미의 확장을 의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꽝당광당’ 쇠붙이 소리의 진원지를 제한된 영역이 아닌 독자가 파악하지 못할 영역에 놓아둠으로써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처에 그런 곳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굉장히 먼 곳일 것이었다. 굉장히 먼 곳일 것이었다.5)
밑거리의 철공장이나 대장간에서 두드리는 소리 같고, 단조로운 소리이면서 송곳처럼 쑤시는 구석이 있는, 신경을 자극하는, 기어이 집을 주저앉힐 소리라면서도, 근처에 그런 곳을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작중화자의 태도로 볼 때 이 소리는 상상적인 공간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며, 작중인물들이 자각하는 어느 지점에서만 들려오는 소리이다. 분단과 이산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영희 가족에게만 들리며 일상의 거친 냄새를 풍기는 식모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또 일상성에 빠진 선재에게 이 소리는 평범하게 들린다. 이 반복적인 소리는 작품을 끌고 가는 비극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커다란 요소가 된다.
5.4. 욕망과 가족구성원의 위치와의 관계
영희가 제한된 시공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하고 선재를 선택하듯 정애도 일탈의 유혹을 꿈꿀 수 있다.
오빠와 한자리에 앉으면 으레 그렇듯이 정애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우수가 서려있었다. 머리를 기웃이 바깥쪽으로 돌리고 되도록 오빠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다.
<중략>
“언니, 언닌 정말 이러구 있을 참이유? 답답하잖우? 오빠란 사람은 저렇게 맹물이구, 대낮에두 파자마나 입구 뒹굴구. 코카콜라나 빨구 앉았구.”
순간 정애와 성식이 동시에 머리를 들었다. 성식의 손에서 스르르 신문이 빠져 나가며 안경알이 또 불빛에 번쩍했다. 정애는 제 남편과 눈이 마주치자 차디차게 외면을 했다.6)
‘으레 그렇듯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성식과의 관계가 소원했던 정애도 일탈을 욕망할 수 있으나 결국 ‘시아버지와 다른 성격으로 백치가 되어’ ‘체념’을 보인다. 이는 가족구성원의 위치상 영희의 욕망처럼 적극적일 수 없는 며느리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5.5. 제목의 의미
이 작품의 제목을 왜 ‘닳아지는 살들’로 설정했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쇠붙이 소리와 함깨 영희 가족의 기다림이 계속될 것이며 그 기다림의 늪에서 쇠붙이도 갈고 갈면 마모되듯 가족 간의 유대감은 점점 마멸되어 제목 그대로 ‘살이 닳아지고’ 그래서 ‘무너앉고’7) 급기야는 ‘마지막 향연’8)을 가져야 한다는 작가의 절망적 인식의 소산이다.9)
5.6. <고도를 기다리며>10)에 나타난 언어의 한계성과 부조리적 요소
<고도를 기다리며>는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떠돌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황량한 길가에서 기다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닌 스스로도 헤아릴 길이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지칠 대로 지쳐있는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 본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하는 것이다. 지루함과 초조, 낭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지껄이는 그들의 광대놀음. 그 모든 노력은 고도가 오면 기다림이 끝난다는 희망 속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루해가 다 지날 무렵, 그들의 기다림에 한계가 왔을 때 나타난 것은 고도가 아닌 고도의 전갈을 알리는 소년이다. 고도가 오늘밤에는 오지 못하며 내일은 꼭 오겠다고 했다는 전갈만을 남기고 소년이 사라지면서 1막이 끝나지만, 2막의 그 다음날도 거의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단속적인 대화의 흐름이나 이야기하는 순간 소리로 전락해버리는 대화 - 언어의 한계성을 통해 실존의 무의미함, 의사소통의 장애 등 ‘부조리’한 인간과 현실의 관계를 이 작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5. 결론
이호철의 <닳아지는 살들>을 분석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이호철은 이 작품에 설정된 건강하지 못한 한 가족의 해체와 몰락을 통해 전망 부재의 60년대 사회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관계성이 약해진 상태에서 고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파편화의 단면을 통해 분단의 비극이 한 가정에 남긴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두운 분위기를 통해 한 가정에 가져다 준 정신적 고통을 상징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이 비극적 분위기 속에 등장인물들은 결코 안락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 분위기가 바로 사회적 모순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의도로, 이런 상황으로 부당하게 억압받고, 부대끼는 소시민의 삶의 고통과 애환을 통해 삶의 총체성을 회복하자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 전쟁을 겪고 난 당대인들의 삶이란 정착되지 못한 채 살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대의 삶이란 역사적인 당위성도 얻지 못한 채 한정된 공간에서 막연히 무엇인가를 기다려야 하는 무력한 정체감 이상은 아닌 것으로, 점차 마멸되어 살이 닳아지는 아픔만이 남는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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