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과 화해의 공간에 담긴 인생살이
-신경림의 「목계장터」를 통해 살펴보기-
1. 들어가며
후기산업사회의 특징인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아방가르드문법, 파괴시, 잔혹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현대시를 지배해가고 있다. 인간의 분열된 자아와 해체의식이 반영된 시는 언어의 외피만을 입은 채 현실을 떠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시들은 난해하기 마련이어서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기가 힘들다. 문학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리얼하게 그려져야 독자가 자신을 비춰보고 삶의 총체성을 깨닫거나 나아가서 윤리적으로 고양되는 경지까지 갈 수 있다. 신경림은 자신의 의식을 드러내는 일보다 ‘우리’로 대변되는 민중의 삶의 애환을 리얼하게 통찰해낸다. 우리 민족의 걸어온 길인 농촌이미지나 유랑의 이미지를 난해하거나 고급스럽게 포장하지 않는다. 민요적 가락과 시상의 흐름, 또 일상 언어 구사가 주는 울림이야말로 신경림의 「목계장터」가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2. 「목계장터」전문
하늘을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찬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3.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유랑이미지
창작이 간접경험이나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해도 직접적인 경험만큼 간절하고 리얼하게 쓰일 수는 없을 것이다. 등단 후 십여 년 동안 신경림이 가진 공백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밑바닥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그의 초기 시는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에 고통 받는 자들의 고단함을 그려낼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신경림 시의 모티프가 되는 길은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신경림은 길이 갖는 공간에 삶의 고통과 괴로움, 슬픔을 간직한 존재들을 불러 앉힌다. 이 존재들은 고향을 상실한 채 방랑자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인 누구라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들에게는 늘 적막감과 함께 현실을 해쳐나가야 하는 고단함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법이다. 신경림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에 방랑의 길을 떠나는 것이며 많은 민중들과 만나서 그들의 삶의 자리를 보고 듣고 전하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서 자신의 내면의 길도 성찰해간다.
4. 「목계장터」를 통해 드러나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
목계는 충주에서 원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로 행정구역으로는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이다. 서울로 가는 길목의 하나로 그 역할을 당당히 하던 곳이며 큰 시장이 서기도 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농촌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들로 인해 몰락의 과정을 겪고 있으나 신경림은 시에서 ‘목계장터’라는 구체적 삶의 공간을 설정한다. 목계를 중심으로 한강변에 사는 사람들의 억센 생명력이 그대로 드러내며, 민중들의 삶의 집결체인 장터의 역할을 적절하게 이용한다. 그 목계장터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연들과 삶의 애환을 시인은 토속적 언어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1인칭 화자의 독백에 의해 드러나는 유랑인의 삶은, 곧 민중 모두의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시는 표면상 1인칭 화자의 독백으로 진술되어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독백을 단지 화자 개인의 삶의 애환을 토로하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떠돌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민중의 고뇌라는 일반화된 삶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목계 장터’라는 생활 현실의 공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서정적 주체가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들이 시적 표현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구름’, ‘바람’ 등으로 표상되는 떠남의 심상과 ‘들꽃’, ‘잔돌’ 등으로 표상되는 정착의 심상 사이의 대조적 표현은 퇴색해 가는 목계 나루에서 방랑과 정착의 갈림길에 서 있는 농촌 공동체의 시대적 삶과 화자의 개인적 삶 사이의 갈등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목계장터」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산과 강이라는 자연환경 사이에 구름, 바람 등 대기적 자연환경을 생성시킨다. 들꽃이나 잔돌의 생성적 자연환경이 서로 작용하면서 인간의 생존과 깊이 연관되어 서로가 필요로 하는 무엇이 되라고 한다. 그러나 서로가 무엇이 되라고 하면 구름, 바람, 방물장수, 떠돌이 등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곳으로, 즉 시인 자신의 방랑길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자세를 굽혀야만 볼 수 있는 들꽃이나 잔돌은 힘없고 나약한 존재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맵고 쓴 서리나 모진 물여울을 해쳐나가기 어렵기에 풀 속에 얼굴 묻고 바위 위에 붙으라고 한다. 이는 서럽고 힘없는 민중들의 삶으로 상징될 수 있는데 슬프고 외롭고 모진 세파에 시달리는 사람살이는 실제로 시인의 애정 어린 마음에 배어나는 깊은 연민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곳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구체화하고 있다.
5. 시적 언어와 율격의 역할
이 시에는 일상어 구사가 돋보인다. 이들은 이 시가 서정성을 띠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 시 제목 자체가 토속성을 띠는 것도 서정성 형성에 기여하는 요소의 하나다. 이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구름’, ‘바람’, ‘들꽃’, ‘잔돌’ 등의 시어다. 이러한 시어들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가를 살피는 일은 이 시를 이해하는 하나의 관건이 된다. 시인에게 있어 ‘구름’과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는 자신의 삶이 운명적으로 규정된 삶의 방식이라고 볼 때 그 운명은 ‘서러운’ 길임에 틀림없으나 시인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것은 뒤집어보면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길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심상 사이에서 방물장수처럼 떠돌이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민중들과 시인 자신의 운명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시인과 시적 자아가 밀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으로서의 신경림도 민중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의 삶의 애환을 전해주는 이야기꾼(방물장수)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는 ‘목계장터’에 앉아 ‘짐부리고 앉아 쉬는 천치’, 즉 ‘장물장수’가 되어 그 모든 변화와 삶의 애환을 보고 듣는 존재가 되라는 계속되는 운명의 소리를 듣고 있다.
이 시의 특징 중에 율격이 주는 미학적 측면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신경림이 민요에 대한 관심을 보이던 한 시기 가운데 가장 빼어난 성과를 이룩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4음보의 가락이 주조를 이루며 ‘하네’, ‘라네’ 의 반복요소가 방랑과 정착의 일상이 교차하는 가운데 생동감 있게 전개된다.
5. 나가며
인간의 삶이란 길을 가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또 길을 가는 행위는 공간의 이동을 의미한다. 공간의 이동 속에 육체가 상하고 때로는 낯설음에 쓸쓸해질 수 있으나 많은 경험은 인간의 내면을 더욱 성숙하게 한다. 신경림도 무수한 길을 유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자연과의 대면을 통해 정신적 세계로 나아갔다. 그의 문학에 일관되게 흐르는 소박한 정서는 낮은 곳에서 외롭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 기인했을 것이다. 이 민중에 대한 관심이「목계장터」에서는 토속적인 언어와 경쾌한 민요적 율격, 그리고 빛나게 대립되는 이미지 속에 형상화되었다. 이는 시인 자신의 삶이 민중의 삶에 천착했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셈이기도 하다. 신경림은 우리민족의 정서를 「농무」를 비롯한 그의 많은 작품에서 리얼하게 드러내며 문명화된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향수 이상의 것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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