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지교(失敗之交)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친구’의 포스터에 적힌 문구다. 폭력이 미화되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우리 삶에 친구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친구 사이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전해진다. 관중을 가리켜 무능한 주제에 욕심만 많다고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변호하며 감싸준 포숙아가 있었다. 그 뒤 천하를 호령할 정도의 위치에 선 관중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포숙아 때문이라고 겸손해 했다. 이 아름다운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낳았다.
거문고의 달인인 백아에게는 거문고를 탈 때마다 들어주고 격려해 준 종자기가 있었다.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어 행복했던 그는 종자기가 죽자 악기를 부수고 그 후로는 켜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생겨난 고사성어가 지음지교(知音之交)라고 한다.
현대는 진정한 친구가 없는 시대라고들 한다. 친구간의 의리와 양보와 이해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고,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물신풍조의 만연으로 인간관계를 돈으로 환산하기도 한다. 부모관계, 이성간의 사랑, 친구 사이에서도 계산대에 숫자를 올려놓고 셈하기 바쁘다. 자기 이익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땐 돌아서버리고 마는 곳에 어찌 우정이 발붙일 수 있을까.
친구가 얼마나 되냐는 질문을 받거나 던질 때가 있다. 범위를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숫자는 달라진다. 성격에 따라 친구를 좁고 깊게 사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넓게 사귀어서 많은 수를 가진 사람도 있다.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하여 홀로 지내거나 때로는 애완동물에게 정을 쏟으며 만족하는 경우도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자기만 아는 세상이라고 말들 하여도 이런저런 모양으로 친구는 필요한 존재이다.
여고를 졸업하고 남녀가 함께 공부하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스스럼없이 대했던 친구 중에서 이성의 색깔을 부각시키며 달려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소담스레 쌓아올린 우리의 모래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 번 무너진 모래성은 거센 파도가 밀려오지 않아도 다시 복구하기 힘들었다. 남녀 사이에 친구관계는 성립할 수 없는지, 또한 사랑인지 아닌지 선택해야 할 때 사랑한다는 감정은 어떤 기준으로 측정되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문득 ‘마음 안에 상대방이 항상 살아 움직이고 있으면 사랑’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만나서 함께 있을 땐 좋다 못해 사랑하는 것 같으나 헤어지고 나서 잊게 되면 사랑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
친구는 이성과의 사이처럼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지는 않지만, 소리 없이 하얀 박꽃으로 피어나거나 싱싱한 강물로 다가온다. 오랜 세월 진실과 이해와 용서로 일군 텃밭이 되어, 다시 씨를 뿌려보자고 손목을 잡아끌기도 한다. 이 텃밭도 서로 가꾸고 매만져야 옥토로 남는다.
소식을 알 수 없어 안타까운, 생각만하면 그리움과 고마움에 마음으로만 불러보는 친구가 있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례가 잦았던 난 늘 부모님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안 앓아본 병도, 안 먹어본 약도 없을 정도로 병과 친해서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 밖에서 놀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 급기야 여고 2학년 초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고는 학교에는 형식적인 출석만 하게 되었다. 조회시간에는 교실을 지키고, 체육시간에는 운동장 구석의 양지바른 곳에 앉아 모래 바람 일으키는 한 무더기의 그림만을 감상할 뿐이었다. 그나마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았다.
등교하는 내게 엄마는 스트렙토마이신을 두 병씩 주셨고 수업이 끝나면 병원에 들러 엉덩이 양쪽에 주사를 맞아야 했다. 죽기보다 가기 싫었던 병원과 주사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반 친구 현인이의 도움 때문이었다. 늘 가방을 들어주고 병원에선 약을 흔들어주고 집에도 바래다주었기에, 난 1년 만에 완치되어 노랗던 얼굴에서 흰 얼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고3이 되어 반이 바뀌고 대학 입시 공부하느라 우리 사이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2학년 한 해 동안의 공백으로 영어와 수학을 복구할 수 없었던 나는 소신껏 대학에 들어갔고, 목표가 있었던 현인이는 재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생활에 충실 하느라 연락을 못하고 지냈다.
미처 봄이 자리 잡지 못했을 때였다. 학교 방송국 8층에서 내려다 본 교문으로 현인이가 들어서고 있었다. 난 직감적으로 그 애가 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1층으로의 계단은 무수히 많았다. 겸손함에 가슴엔 배지를 달지 않았지만, 추궁하는 내게 E여대에 입학했다고 했다. 친구의 성공 앞에서 내 마음에 등불이 켜지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이어지던 우리 관계는 내 사정으로 다시 연락이 끊겼다. 그 후 정말 많이 찾았으나 보지 못한 채 아쉬운 세월이 흘렀다. 여러 가지 후회는 나의 몫으로 남았고, 우정을 관리 못한 가슴엔 실패지교(失敗之交)가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