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시

사평역에서

아침햇살로만 2010. 12. 23. 23:25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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