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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그 목소리

아침햇살로만 2006. 6. 16. 10:15

 

그날의 그 목소리

                                                            

 이제는 장마가 이제는 물러갔다고 한 게 어제 마지막 뉴스에서였다. 그런데 지하철에 타는 사람들은 모두가 비를 맞은 행색이었다. 요행히 우산을 챙겨온 듯한 사람도 보였지만 대부분 유쾌하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다음 역에 내려야 할 내가 당장 큰일이었다.   k와 만나기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뱃속에 애 가진 딸 앞에서 내가 그런 짓을 하겠어?”

인파를 헤치고 출구 쪽 계단을 오르는 내 뒤편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멈칫 뒤돌아보려던 나는 아예 계단을 거슬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인파를 피해 계단 밑으로 내려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두가 앞으로 돌진하는 것 밖에 모르노라고 말하는 듯 했다. 역사에도 이미 습한 기운이 흐르고 있어 어깨가 부딪힐 때마다 짜증이 났다. 끼쳐오는 땀 냄새 또한 열차가 빠져나간 공간을 새롭게 메우고 있었다.

“아줌마, 내 지갑 돌려줘요. 제발……. 내 가방에서 빼갔잖아요……. 내놔요. 빨리…….”

“아니, 얘가 생사람 잡네.”

나는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도도하게 날 선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리 속을 비집고 들어섰을 때 내 추측의 정확성에 스스로 놀랐다. 

3년 전 그날도 이렇게 비가 내렸던 것 같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급히 우산을 사려고 백화점에 들렀다. 화려한 조명등 아래 판매원이 하나씩 펴 보일 때마다 우산은 다양한 형상으로 피어났다. 어느 순간 나는 영화 ‘쉘브르의 우산’을 떠올리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주유소에 눈이 날리던 눈을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진 듯 했다. 판매원도 폈던 우산을 접었다. 연이어 긴장시키는 목소리가 허공을 날았다. 내가 서 있던 곳에서 제법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뱃속에 애 가진 딸 앞에서 내가 그런 짓을 하겠어?”

60세 정도의 풍채 좋은 여인과 서른이나 되었을법한 여인과는 동행이었다. 그들은 정말 모녀지간으로 보였다. 내 눈길은 딸에게로 자주 향했다. 딸도 엄마의 풍채를 닮아 둥근 몸매를 갖고 있었다. 판매원과 안전요원들에게 호통 치는 엄마 옆에서 그저 고개 숙인 채 눈물만을 흘렸다. 애석하게도 진위가 가려지는 걸 보지 못한 채 나는 곧 그 자리를 떠야 했다.

역시 나는 K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떠야 한다. 그 때 백화점에서 훔친 것에 대해선 어떤 벌을 받았을까, 혹시 저들의 말을 믿어주었을까, 가졌다던 애는 낳은 것인가, 또 새로운 애를 가진 것인가, 정말 저들은 모녀지간인가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아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지는 걸 어찌해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