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와 미끼
공짜와 미끼
모처럼 집안을 청소하는데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자, 모든 주민여러분께서는 하던 일을 멈추시고 봉고차 앞으로 나오십시오. 농협에서 여러분들에게 신토불이 정신을 심어주고자 꿀 한 병씩을 선물하겠습니다. 딱 10분간만 머물 테니 어서어서 나오십시오.”
청소기를 발로 눌러 끄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은행나무와 등나무가 정답게 어울려 있는 곳, 그 사이로 쑥색의 차가 보였다. 이어지는 확성기 멘트는 계속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꿀 한 병이라……그것도 농협 것이니…… 안 받아오면 나만 손해?’
마음이 급해졌다. 옷을 주워 입고 신발을 신으려는데 전화가 왔다. 받고 보니 ‘영재 어멈이니? 나야……’로 시작하는 2시간짜리 전화였다.
시어머니와의 통화도 끝이 있다. 분부내릴 목적 없는 시어머니와의 통화는 지루할지언정 수화기를 내리는 순간 그 홀가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한낮의 햇살과 새소리가 어우러진 거리로 나왔다. 야릇한 행복감을 느끼다가 오늘 저녁은 무엇을 해 먹을까 생각에 발걸음도 경쾌하게 슈퍼로 향했다.
그런데 소스라치게 놀랐다. 까맣게 잊었던 그 확성기 현장이 눈앞에 있었다. ‘농협’이 아닌 ‘농헙’이라 쓴 휘장을 둘러친 개조된 차 주변에는 누군가의 연설을 듣는 종아리들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휘장을 들춰 보았다. ‘언제나 꿀을 주려나’ 기다리는 할머니들의 지친 얼굴들이 있었다. 손에는 차 색깔과 같은 쑥색 수세미 한 장씩만을 들고서.
허탈감이 밀려 왔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장삿속에 순진한 할머니들을 두 시간 이상 벌세운 것이다. 어쩌면 스무고개 넘듯이 계속되는 문답에 포기 못하는 시간이 흐른 것일까.
김포군 고촌면에 사시는 시어머님은 농사와 함께 세월을 보내셨다. 종가집 외며느리로 시집와 서른아홉에 혼자 된 당신의 시어머니와 다섯 아이 거두며 수없이 많은 밥을 논으로 들로 나르셨다. 제사는 왜 그리도 많은 지 달력에 하나하나 지워가다 보면 일년이 가고 또 일년이 갔다고 한다. 가릴 수 없는 햇빛과 매만지는 흙으로 인해 고왔을 얼굴과 손톱 밑은 늘상 검은 빛이다.
이제는 그 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자식들 모두 출가해 여자의 일생 중 상당 부분을 갈무리 하셨다. 봄이면 부추와 시금치 도려내고, 또 여름배추와 열무 솎아 자식들 김치 담가주는 재미에, 가을이면 겨울김장 준비에 오로지 밭에서만 사시더니 일 년 전부터 출근을 하게 되셨다. 이름 하여 ‘신토불이 학교’라는 곳으로다. 그 곳에 다니면서부터 어머님은 부쩍 바쁘고 부지런해지셨다. 시골초등학교 교장으로 계시다 정년퇴직한 아버님은 자신이 40년 만에 집에 있게 되니 마누라가 출근을 시작했다고 비꼬신다.
아침식사 후다닥 해치우고 옷 입고 신토불이 학교로 가면 출석도 부르고 공부 비슷한 것도 하신단다. 이름 하여 건강강좌. 손뼉도 치게 하고 진맥도 하고 건강에 대한 본격적인 강의가 끝나면 다른 코스가 기다린다. 안마침대, 돌침대, 옥매트 등에 누워 몸을 지지는 것이다. 그러다 주무시기도 하고 친목의 일환으로 동양화 놀이도 한다. 도시락을 드시거나 호기 있게 철가방을 부르기도 한다.
시댁에 갔다가 집에 올 때쯤이면 갑자기 어머님은 바빠지신다. 장독대의 멸치젓 병, 봉당 한켠에 세워 둔 게르마늄이라나 꼭 요강처럼 생긴 김치통, 거실 선반에 곱게 모셔 둔 옥가루가 붙어있다는 남편팬티를 챙기느라고이다.
어디서 났냐고 여쭈면 신토불이에서 산 건데 좋은 거라고 하신다. 비싼 거라고 못을 박기도 한다. 감사하다며 용돈을 드린다. 그러나 집에 와서 사용하기에는 찜찜해서 그대로 세월만 흐르기가 일쑤다.
다섯이 되는 출가한 자식며느리들의 생필품을 대느라 시댁은 물건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며느리들은 물건값에 상응하는 용돈을 준비해가느라 조금씩 얼굴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들들은 어머니가 아프지 않고 신나게 사는 모습을 봐서 좋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어머니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건강에 대한 지식으로 넘쳐났다. 검은콩을 먹어야 좋대, 현미를 먹어야 한다더라, 뒷골이 땡기면 옥베개를 베야한다 등등.
아버님은 했던 말을 또 하는 어머니가 지겨우신 듯 건강강좌가 시작되면 ‘에이’하며 옆으로 돌아앉으신다. 어쩌면 수십 년간 학교에서 참새처럼 떠들어대는 아이들에 질리신 것일까.
어머니들이 물건을 사지 않고 다니기는 어렵다고 한다. 자식들의 직업에 대한 정보가 있어 큰아들이 어디에 다닌다는데 이것 하나 사달라고 해라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건을 사 오신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들이 지속적으로 다닐 수 있음은 미끼 상품 때문이다. 출석하는 자에게는 설탕, 식용유, 부엌세제, 가루비누, 휴지 등을 나눠준다. 공짜라는 것은 분명한 매력이 있다. 그것을 받아내는 것이 정상이고 받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을 받아냄으로써 비싼 옥매트, 돌침대를 사는 것이 아깝지 않다. 나 역시 공짜에 약하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검정 비닐봉투 한 장이라도 더 받아내야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그러나 미끼 상품은 품질이 낮다. 식용유를 비롯한 양념류는 찬찬히 보면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 대부분이고, 휴지는 먼지가 풀풀 날리고, 세제는 아무리 많이 써도 거품이 일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으로 들고 와서는 누굴 줄 수도 없고 내가 쓸 수도 없이 베란다에 잠자고 있는 골치 덩이들……. 급할 땐 이리 넘고 저리 넘고 하다가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공짜란 꼭 손에 잡히는 물건만일까 생각해 본다. 철 따라 눈을 즐겁게 하는 꽃, 새소리, 까르르 웃음소리, 숨이 멎을 것 같은 노을은 신이 우리에게 평생 공짜로 주는 선물이다.
며칠 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저 하늘 너 다 가져’라든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서있는 나무는 낙엽은 모두 네 거야’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