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논문

<길은 그리움을 부른다>에 대한 분석

아침햇살로만 2006. 6. 16. 09:40
 

                   쓸쓸하기에 사랑하며 가는 인생길

                 - <길은 그리움을 부른다>에 대한 연구 -


                                                    

1. 머리말

드라마가 텔레비전 방송의 꽃이라고 불리지만, 과연 제작되는 그 수만큼 질적으로 따라가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볼 때다. 공중파방송드라마는 그 속성상 시청률을 도외시할 수 없다. 따라서 주제와 형식, 소재, 갈등기제, 드라마 제작기법 등에 다양함을 담아내기 보다는 흥미 위주로 제작되기가 쉽다. 멜로드라마를 예로 들 경우 캐릭터가 재벌 2세, 신데렐라, 억척녀로 설정되거나 갈등기제는 자극적인 출생의 비밀이나 암과 같은 중병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내용의 차별화가 쉽지 않다.

물론 선택권을 가진 시청자 스스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하지만, 무엇보다 드라마를 집필하는 작가의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건전한 작가로서의 자격을 갖춘다는 것은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고,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인생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많은 시청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인 <길은 그리움을 부른다1)>는 단편소설인 <나뭇잎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이균영)2)>를 이란이 각색한 드라마대본으로, 30여 년 동안 백만 킬로미터를 무사고로 운행한 노기관사 박석우가 젊은 기관사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기구한 사랑과 운명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이라는 진부한 소재도 작가의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창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많은 인격 장애 드라마가 양산되는 시점에,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한 인간애에 초점화 되었다고 판단한 바, 이 작품을 휴머니즘에 기초해서 연구하려고 한다.

 

2. 본론

2.1. 철길에 대한 연구

‘길’은 통상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의 길에는 희로애락, 희망과 좌절, 활기와 실의 등 각양각색의 삶의 자국들이 남기에, 이 ‘길’은 많은 문학작품에서 작가들이 선호하는 소재가 된다.

옥순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하고 ‘철길’은 그곳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된다. 그러나 반생을 철길에서 보낸 석우는 미혹당하지 않는다. 석우의 원숙한 지혜는 새로운 세계란 어디에도 없으며, 삶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빛나는 무엇일 뿐이라고 말한다.


서로 닿을 듯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결코 만날 수 없는 레일들이 잠시 보여진다. <신 1>


<신 1>에서 청량리역의 배경 중에 서로 닿을 듯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결코 만날 수 없는 레일들이 잠시 보이는 장면을 설정했는데, 이 레일은 인물과 환경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암시한다. 즉, 서로가 사랑은 하지만 바라보는 곳이 다른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운명을 상징한다. 석우와 옥순, 석우와 아진, 옥순과 성호, 석우와 성호가 모두 사랑하는 사이면서도 함께 할 수 없는 철길 같은 운명들이다. 


옥순 : 넌, 좋겠다. 늘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어서.

석우 : 변하는 것도 너고, 떠나고 오는 것도 너야. <신 47>


철길은 무위의 공간이 아닌 생명의 끊임없는 움직임, 즉 동성(動性)을 자극하는 요소를 지니기에 ‘여기 있음’과 ‘떠남’의 정서를 환기해주는 요소가 된다.   


2.2. 인물에 대한 연구 

드라마는 인간을 그리는 것이며 갈등이기에 등장인물의 행로는 바로 드라마의 스토리가 된다. 따라서 극에서 그들은 성격을 전해주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함으로써 성격을 그 속에 지니게 된다.3)


석우 :세상은 누구에 의해 움직여질 것 같애?

      기다리고 순응하는 사람들이야.  <신 45>    

      난 이대로가 좋아. 이게 내 길이지 싶어.

      난 널 그리워한 적은 있어도 미워한 적은 없어. <신 47>

      넌 그 남자를 절대 가질 수 없어, 왜 그걸 몰라? <신 55>

    

석우는 현실순응형의 인간으로서, 자기 영역 밖의 것을 탐내지 않고 묵묵히 살아왔지만 그에게도 사랑 때문에 혼란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청년기를 온통 사로잡았던 옥순과의 소중한 사랑은 석우에게 있어 빛나는 날들로 기억되지만, 잠재울 수 없는 끝없는 열망의 길을 찾아 떠나는 옥순으로 인해 그 첫사랑은 고통이 되기도 한다. 그 무너진 마음의 둑으로 넘쳐오는 그리움과 증오의 감정들로, 석우는 기관사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사랑의 좌절이 그로 하여금 평생 어딘가로 떠날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을 만든 것이다. 4)

그 후에도 옥순과의 재회와 이별, 술집 여자 아진과의 만남과 동거를 통한 파란만장한 사랑의 여정은 계속된다. 사무치는 마음에 대한 위안과 망각을 얻게 된 것이 바로 아진과의 또 다른 사랑을 통해서라고 규정짓는다면,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사랑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는 쓸쓸한 아이러니가 되기도 한다. 옥순에 대한 사랑도 끝나지 않은 상태기에,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마음이 진정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이별을 통해 만남을 이루는 소멸과 생성의 변증법적 원리에 바탕을 두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석우 : 이 사람 전 버릴 수 없어요. 저 때문에 또 울게 할 수 없어요.<신 88>


석우는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아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진이라는 착하고 불우한 여인을 사랑해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따뜻한 인간애는 조건으로 사랑을 선택하지 않을 뿐더러, 사랑을 배신하지도 않는다.

가난했던 석우의 첫사랑인 옥순은 계층 상승과 새로운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욕망의 화신으로 석우의 삶을 끊임없이 왜곡하면서 아들 하나를 남기고 자신의 이상향 미국으로 떠난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더 매혹적인 환상을 향해, 현실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옥순 : 바로 저거야! 저 기차가 우리를 여기서 벗어나게 해줄 거야.<신 23>

       우리는 함께 꿈꿀 수 없어.

       난 또 딴 세상이 보여.

       그곳으로 가지 못해 괴로워.

       난 이 변두리 양장점에만 만족할 수 없어.

       그 남자는 나의 꿈이야, 넌 나의 고향이고…….<신 55>


아무런 발전도 없고 자극도 없는 낙후된 일상을 운명이라 견디며 살기보다는 보다 나은 미래를 믿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꿈으로부터, 옥순과 석우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고단함이 시작된다. 허구라고 믿고 싶지 않고 실패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옥순의 이 꿈은, 자신을 견디게 하는 환상이 되기도 한다.

탄광촌의 작부 출신인 아진은 언제 작부였는가 싶게 석우를 세상 최고의 남자로 섬기며 살뜰한 애정을 쏟아 붓는다. 딸 인혜를 낳고 옥순이 낳은 성호를 데려다 키우는 착하고 헌신적인 아진은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다가 7년 뒤 죽는다. 영동선이 지나가는 고향 솔티재 언덕에 묻힌 그녀는 석우의 가슴에도 묻히게 된다.


석우 : 그 사람 떠나고 난 혼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신 97>

       저 언덕에서 우리 집사람이 나를 보고 있어. <신 105>


이렇게 석우에게는 그의 고독한 삶을 지배한 두 여인이 있었다.



2.3. 주제에 대한 연구

작품을 통해서 그곳에 녹아있는 작가의 가치관이나 사상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제와 연결된다. 작가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과 그의 인생관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간도 기차처럼 앞으로만 나아가기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돌아볼 때는 온통 회환과 아쉬움만이 남는다. 우리 인생의 숙명적인 그리움과 쓸쓸함을 작가는 평생을 기차와 함께 한 기관사의 생애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수어린 회한에 휩싸인 기관사 석우의 추억과 회상이 이 작품의 주제로, 인간은 누구나 영원히 만나지 않는 철로처럼 원초적인 고독과 대면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5)

 

2.4. 구조에 대한 연구

작가는 석우의 상념을 장구한 시간 속에서 헤아리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현실의 시간과 과거를 교차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30여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여정을 역순으로 회상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드라마에서의 사건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당위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때 한 몫을 하는 것이 복선이다. 이 복선은 독자가 눈치를 챌 정도로 깔아도 안 되지만, 시청자가 그 장면은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청자가 기억할 수 없는 복선은 복선의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6)


석우 : 가는 세월과 여자는 잡지 못하는 법이지. <신 20>

아진 : 난 굴 잘 뚫는 것보다 오래오래 길게 달리는 게 좋더라.<신 74>

자명종을 누르며 일어나던 아진, 그러다가 푹 엎어지고 만다. <신 86>


위의 예들은 대본 상에서는 쉽게 눈에 띄기에, 작가가 허술하게 설치했고 이로 인해 독자가 식상할 거라고 여겨지지만 완성된 드라마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요소가 된다. 감추면서 효과를 내야하는 소설과 드라마 대본은 복선에서 차이가 난다.


2.5. 문학소설을 영상화한 것에 대한 연구

문학소설을 영상화한 것과 소설과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영상은 순간적으로 뇌리에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인간 의식의 심층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문학은 인식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주고, 영상물은 감각에 호소하고 현장감을 느끼게 하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문학과 영상물끼리 배척할 필요는 없다. 영역이 다르다고는 하나 공유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영상물이 상업적 목적을 위해 제작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나, 문학을 통해 접근한다면 개연성이 없거나 주제의 부재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작품이 양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3. 맺음말

인생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작품은 이념보다도, 달콤한 연애감정보다도, 바로 따뜻한 인간애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메시지를 준다.   

옥순과의 회환으로 남은 사랑, 옥순이 병원에서 죽어간다 하여 잊기 위해 노력하던 석우가 달려가는 것, 술집작부 출신 아진의 현모양처형 아내역할, 살만할 때 걸리는 병과 죽음, 아침에 들려왔던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바로 집 나간 아들 성호의 아이라는 귀결을 두고 신파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더 드라마적이고, 더 신파적이다. 삶과 인간, 그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복잡다난한 얼개에 합목적성이나 합리성, 논리적 일관성 따위는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 삶은 모순과 모순의 변증법적 재현의 장이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주된 정서가 인생은 쓸쓸하고 고독하다는 명제와 연결되기에, 이를 작가의 고급정서인 센티멘탈리즘의 표출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의 따뜻한 휴머니즘은 우리에게 ‘삶이 쓸쓸하고 고독해서 행복하지 않더라도 현실에 순응하며 사랑과 용서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사유의 깊이를 지닌 작가의 요절은 우리 문학계에 큰 손실이다.

4. 참고문헌

권성우. 비평의 희망. 문학동네. 2001.

김수현외. 드라마 창작 아카데미. 펜타그램. 2005.

드라마 연습.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아리스토텔레스. 김재홍 역. 시학.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