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선물
1.
서울시 양천구 목동복지관 2층.
문맹으로 내게서 한글과 산수를 배우는 노인대학 학생인 어머니들과의 수업시간이다.
“자, 이제 다른 것 집어넣으시고 받아쓰기 준비하세요.”
부스럭거리는 소리, 공책 넘기는 소리, 연필 꺼내느라 양철필통 여는 소리.
일 번, 이 번 불러가면서 교실은 침묵 속에 가라앉고 책상을 두드리는 연필 소리만이 가득하다. 빨리 쓴 어머니는 다 썼다는 듯 연필을 쥔 채 날 빤히 쳐다보고 못쓴 어머니는 옆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다 썼지요? 팔 번은 송편, 깨도 넣고 콩도 넣어 예쁘게 빚는 송편, 솔잎을 넣어 찌는 송편이요.”
책상 사이를 누비며 공책을 보면 주로 ‘소편’이라 써 있고 어떤 경우 ‘소변’이라고도 써 있다. 소변이 송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열심히 설명을 드려 본다. 그러나 난감한 얼굴이 되어 공책 위로 연필 촉을 세우고만 계신 어머니. 대신 연필을 쥐고 써버리고 싶다.
간절한 마음이 되어 다시 한 번 힌트를 드린다.
“공, 용, 방처럼 ‘소’가 ‘송’이 되려면 어떤 받침을 써야 될까요?”
“똥글뱅이”
숨 넘어갈 듯 옆의 다른 어머니가 대답한다.
다음은 산수 시간.
글씨 쓰는 것은 어려워도 보태기, 빼기는 잘들 하신다. 호떡이 천 원에 세 개인데 삼천 원을 내면 호떡 몇 개를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아홉 개’라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한글은 어려워도 셈에 있어서만큼은 척척박사인 모습에 우리는 모두 가정주부라는 생각이 든다.
가정 속에 닻을 내려 적지 않은 자녀를 생산해내고 궂은 일로 세월을 보내느라 거칠고 커져버린 손, 그 손안에 연필은 다루기도 힘든 존재다. 칼로 길게 깎은 연필의 검버섯 얼룩진 손이 가끔씩 나의 시선을 붙든다.
내 제자들은 참으로 순진한 소녀들 같다. 60세 이상의 노인들이라서 허리도 굽고 걸음도 느리지만 몸가짐은 항상 단정하고 수업 시간에 지각하는 법이 거의 없다. 수업 중 조용히 해라, 집중해라 말할 필요도 없다. 막 이슬에 젖은 토끼눈 같다.
한 가지 어머니들이 너무 겸손한 것이 탈이다. 선생님, 너무 몰라서 죄송해요, 가 입에 배었다.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문지방만 넘어가면 잊어버리니 어떡하면 좋으냐고도 하신다.
평생 한글을 모르고 살아오시느라 남모르는 눈물도 많이 흘리셨다고 말씀하신다. 어릴 때 여자라는 이유로, 집이 가난해서, 남의 집에 얹혀사느라 배울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야 새 삶을 찾은 것 같다고들 하신다.
가끔 출석을 부르다가 가슴이 아파질 때가 있다. 눈길에 넘어져 엉덩이뼈가 부러져서, 관절염이 심해져서, 봐주고 있던 손주가 데어서 결석을 할 때다. 그럴 땐 몇 달씩이다. 어떤 어머니는 영영 못 오실 몸이 되셨다. 못이 박힌 듯 항상 앉아 계시던 그 자리가 허전하다.
어머니들과 함께 하면서 당황했던 적이 두 번 있는데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한 번은 수업이 끝났는데 어떤 어머니가 검정비닐을 내밀었다. 김장을 담았는데 세 포기 싸왔다는 것이다. 감사하다며 받았지만 영 마음이 아니었다. 그 날은 수업 후 친척 결혼식에 가야해서 모처럼 분홍 원피스를 입고 멋을 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무릎에 올려놓은 채 창 밖 풍경을 바라보는데 시큼시큼한 냄새가 느껴졌다. 어느 틈에 새어나온 김치 국물은 원피스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누가 검정 비닐에 싼 무언가를 내밀면 그 때 일이 떠올려진다.
또 하나는 떡볶이 떡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새벽에 떡을 쪄서 찬 물에 담가 기름칠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손가락을 데었단다. 붕대로 감은 모습이 과장되게 보일 정도로 상처가 깊었던 듯싶다. 그런데 그 손으로 만들었다며 벙어리 주방장갑을 주셨다. 선생님은 데이지 말고 조심하라며…….
2.
횡단보도를 급히 건너려는데 손바닥만한 좌판을 벌이고 쪼그린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뭔가가 있어 다시 한 번 쳐다보던 내 눈이 커지고 있었다.
몇 해 전 바쁘다는 핑계로 노인대학 강의를 그만 두었다. 눈물을 훔치며 아쉬워하는 어머님들의 손을 잡으며 ‘곧 다시 올 게요’했지만 솔직히 그 복지관 문을 나서며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 즈음 늦게 시작했던 공부가 끝이 나며 사설학원들로부터 아이들 가르치러 오라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시간을 요리조리 분배하다보니 한 주에 두 번씩 하는 대낮의 이 강의가 걸림돌이 되었다. 교통비 정도가 고작인 수고료, 그 시간엔 이해한 듯하나 다음엔 원위치로 가 있는 어머님들의 기억력의 한계가 날 슬슬 지치게 만들었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파릇파릇하다 못해 통통 튀어 오르는 아이들과 함께 하며 나도 가벼워졌다. 그리고 4년간 함께 했던 그 곳은 잊혀졌다.
양말을 고르게 진열하는 뒷모습에 다가가 ‘김말순 어머니!’라고 외쳤다. 돌아보며 응시하던 눈이 빨개진다. 이윽고 우리는 손을 잡고 어깨를 얼싸안았지만 곧 헤어졌다. 난 그날도 바빴다. 정신없이 지갑을 열어 지폐 몇 장을 쥐어드렸을 뿐이었다.
버스에 오른 내 손에는 검정비닐이 들려 있었고 그 속엔 고운 양말들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뙤약볕 아래 무료한 시간들마다 이것을 털고 쓰다듬고 곱게 개키며 보냈을 터. 건네주던 손의 감촉이 아직 남아있다. 투박하던 만큼 내 가슴이 아리다.
창밖엔 수많은 차들이 있고 또 그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차에 오르거나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한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내가 아는 얼굴들을 헤아려 본다. 이름까지 알 수 있는 경우는 한 100명이나 될까,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을까. 사람을 두루 사귀지 못하는 나로서는 영 자신이 없다. 그런데 조금 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있었다. 어머니, 그것은 얼마나 고요하며 가슴이 더워지는 단어인가. 떠나보내려 애쓰지 않아도 슬그머니 가버리던 것들이 다시 제자리로 오고 있었다.
절대로 비켜나지 않을 듯한 올여름이었다. 창문을 밀어 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기분이 제법 괜찮다. 길모퉁이엔 과일트럭이 한 대 서 있고 아주머니 둘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한 바구니에 3000원’이라고 쓰인 토마토 옆에는 덜 여문 감도 선을 보인다. 그 옛날 친정 엄마가 손에 들려주던 삭힌 감의 맛을 떠올려 본다. 혀보다 눈이 떫다. 밀려드는 그리움을 잠시 접으며 맑은 하늘에 이렇게 써 본다.
“오늘의 선물이 너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