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이 가을을 천천히

아침햇살로만 2006. 6. 15. 22:06
 


                               이 가을을 천천히


‘가는 년(年) 아쉽고 오는 년(年) 반갑네’

한 해를 보내며 스님들 사이에 오갔다는 신년 인사의 글귀다. 연하장 콘테스트에서 대상으로 뽑히며 수많은 패러디를 낳다가 ‘이 년(年)이 가면 새 년(年)이 오네’ 업그레이드 버전까지 나왔다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가벼운 듯하나 해학이 넘치는 인사임에 틀림없다.

이제 시월인데 웬 새 해 운운이냐 할지도 모른다. 8월이 가면 그 해 일년이 간다는 말이 있다. 선운사의 동백이 만개하자마자 목이 푹 꺾이듯 여름의 절정에서 곧 가을이다. 곧 이어 대청봉에 눈 소식, 거리에 울려 퍼지는 캐롤송은 새해로 가는 썰매를 타게 한다.

고추를 익게 하는 따끈한 햇살을 등에 느끼는 것도 잠깐이다. 낙엽이 주는 허허로움이 목젖을 타고 가슴을 울릴 때 허청허청 겨울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앞날을 예측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아도 시간은 우리를 옮겨 놓는다. 시간의 중심에서 조금씩 벗어날 때 우리는 늙음이라는 단어와 친숙해져야만 한다. 가을 햇빛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 예측의 화살도 빠르게 움직인다.

세월도 세월이지만 나이가 들며 나잇값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난다고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따스한 햇살을 품은 가을 같은 중년의 자태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늘 긴장과 초조와 동당거림의 연속이다. 이러한 증세는 지난 세월의 깊은 상처와 잦은 실패의 반복이 두려워서가 아닌지 모르겠다.

일본에는 ‘슬로 라이프’가 번져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빨리빨리’ 문화를 돌아보자는 지적이 있듯이 일본의 눈부신 고속 성장의 뒤안길에는 장기불황과 황폐해진 삶이라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 여기서 생겨난 반성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삶을 즐기자는 운동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당신이 살고 있는 1분은 몇 초인가. 잠시 하던 일을 놓아두고 눈을 감아보라. 그리고 한 1분쯤 지났다고 생각될 때 눈을 떠 몇 초가 지났는지 확인해보라. 단 숫자를 머릿속으로 세지 말 것.’

현대인이 얼마나 바쁘게 사는가를 보여주는 간단한 실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40초 정도 지나면 눈을 떠버린다고 한다. 1분이라는 시간조차 여유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삶의 속도가 느긋할 때 스트레스도 훨씬 적어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인데 말이다.

새 달이 되어 달력을 한 장 넘길 땐 미지의 세계, 채색되지 않은 순결의 시간 앞에 놓여있음을 느낀다. 빠닥빠닥한 종이의 질감처럼 내 자신도 세월에 맞서보고자 한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며 기억해야 할 많은 메모로 채워지고 빈 공간만이 드문드문 시선을 붙든다. 뭔가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은 강박관념에 익숙해진 것이다. 삶 그 자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간의 노예가 되어 오히려 시간을 잃어버렸다.  

지난 해 캐나다를 다녀왔다. 지루한 비행이 끝나고 토론토 공항을 벗어나  끊임없이 달리며 내가 다른 시공간에 놓여졌다는 것 이외에는 느끼는 바가 없었다. 그저 시야로 달려드는 광활한 자연에 압도 될 뿐이었다. 조금씩 시간이 가며 그 나라사람들이 외모뿐만 아니라 무언가 나와는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처음엔 딱히 뭐라고 꼬집어 낼 수 없었다.

한 달간 머물며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은 바로 여유와 느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리져 있는 그들 속에서 평범하지 못하게 튀는 것, 그것은 내가 원치 않는 곳에서 자꾸만 생겨나며 나를 힘들게 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부러워했지만 흉내낼 수 없었던 그들의 여유는 국가적인 테두리 안의 숙명임을 알게 되었다. 넓은 지하자원과 사회 복지가 갖추어진 나라와 좁은 땅덩어리에서 인적 자원 밖에 없어 서로 경쟁하며 나눠먹어야 하는 우리나라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괴리감이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된 것이다.

이 가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현재를 바라보아야겠다. 가던 길을 멈추고 현재를 바라봄은 청룡열차를 타고 돌 듯 속도와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자신에 대한 무한한 연민이 피어오르기 때문일까.

유년 시절부터 읽었던 책 중에 ‘빨간머리 앤’이 있다. 원래 어른을 위한 대하소설인데 우리나라에는 앤의 성장기에 대한 번역만 있어 와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잘못 알려져 있다. 지금은 열 권 완역판이 나와 있다.

급한 때일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해결해야 할 일들 앞에서 한숨이 새어 나올 땐 가슴 속에 생겨난 오솔길을 따라 그린 게이블즈로 앤을 만나러 간다. 꺼질 줄 모르는 상상력으로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앤에게서 시간이 멈춘 듯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영원한 현재다. 인생의 시제는 늘 ‘현재’여야 하고 삶의 중심은 언제나 ‘오늘’이어야 한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다른 말일 뿐이다. 현재를 잘 사는 것은 미래를 계획하는 것보다 훨씬 시급한 일이다. 정말로 살아 있을 때는 삶 그 자체가 전부가 되어 살아가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내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온통 초록인 줄만 알았는데 연주황의 감이 삐죽 얼굴을 내밀고 가시어가는 작열의 햇빛 아래 곧 붉어질 대추가 주렁주렁이다. 새벽 공기는 이불을 끌어당기게 하고 세숫물은 차가워지고 아침 새소리는 더욱 날카롭다. 부딪혀오는 차가움에 내 이성의 오감이 또렷해진다면, 맑은 하루하루를 길어 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근본적인 것은 늘 감동을 주는 법이다. 계절의 순환이 주는 메시지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두드린다. 스님이 법당문을 열 듯 매사를 신중하고 진지하게 사는 일이 이 가을을 영원한 현재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