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논문

'차천의 오이' 심리학적 연구

아침햇살로만 2009. 4. 16. 23:03

 

                                  「차천의 오이」 심리학적 분석


  1. 들어가며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시학』에서  ‘연민과 공포를 통한 카타르시스’로 비극을 정의하며 예술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본격적인 인간의 심리에 대한 연구는 20세기에 들어와 프로이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간의 마음에는 자신이 의식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이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행동이나 의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밝혔다. 바로 무의식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 중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식이라는 부분보다 마치 빙산처럼 물속에 잠긴 무의식이라는 부분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융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개인무의식 이론을 비판하고 집단무의식 이론을 내놓았다. 그의 업적은 외향적`내향성 성격, 원형, 집단무의식 등의 개념을 제시하고, 발전시킨 데 있다. 인간 체험의 원초적 근원이나 집단 무의식의 실재적인 내용으로 보면서 원형의 표현은 원초적인 심상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무의식에는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페르조나 등이 있다. 인간은 통상 자신을 ‘나’라든가 ‘자신’이라고 인식하며 살아간다. 이때의 나와 자신은 곧 자아이며 과거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줄곧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기동일성을 갖고 있다.

설화는 이야기다, 이야기 중에서도 우리 생활 속에서 생겨나고 전해지는 흥미 있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이런 성격을 지닌 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신화는 더 이상 생성되기 어렵고 전설도 옛날처럼 생겨날 수 없는데다가 원래의 이야기가 새롭게 변모하기도 하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선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생겨나는 이야기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을 가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심리학적 분석으로 짚어볼 때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현재의 삶 역시도 조명해볼 수 있다.


2. 「차천의 오이」분석

 

 

그에게는 자식이라고는 딸 하나가 있었을 뿐이어서 그들 내외는 아들 하나 가지지 못하는 쓸쓸함을 다만 딸에게서부터 마음의 위로를 받으면서 날이 갈수록 어여뻐지는 딸을 보는 것이 그들 내외에게는 단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  어여뻐지는 딸을 보는 것이 단 하나의 즐거움이었다’는 것은 융의 집단 무의식중에서 여성에 대한 아니마 상을 읽을 수 있다. 아니마는 인류가 조상 대대로 이성에 관해 경험한 모든 것의 침전물로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가 된다. 융은 꿈과 신화, 만화, 문학작품 등에 나타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전형적인 모습을 연구함으로써 남성의 본질, 여성의 본질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인 면을 인식인격 전체 속에 짜 넣는 것이야말로 자기실현에 있어서 불가결하며, 또한 현대인에게 긴급한 과제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 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 아침 일찍이 그 처녀는 물동이를 이고 지금의 화순읍 남산 기슭에 있는 ‘차천(車泉)이라는 우물에 물을 길으려고 보니까 그 우물 위에는 뜻밖에 오이 한 개가 떠 있었다. 몹시 추운 겨울에 때 아닌 오이가 있는 것을 이상히 생각하였으나 문득 그 오이가 먹고 싶어서 건져서 먹고 말았다.


오이는 남근을 상징한다고 본다. 과일이나 야채 중에 당근, 오이, 가지, 바나나 등이 남근의 모습과 비슷하기에 실제로 중세시대 때 남성의 성적인 치료를 위해 약용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또 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라면 현재 성년식을 하는 대학 1학년 정도의 시기로 성인으로의 입문을 암시한다. 겨울날 아침 일찍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는 내용으로 보아 처녀가 건강한 성인이라고 할 수 있기에 성적인 욕구를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배 씨 내외가 아들하나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딸에게 다산을 바라는 절실함이 표출된 것으로 분석할 수도 있다. 건져 먹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위해서는 오이가 여러 개 아닌 딱 한 개가 떠 있어야만 했다.

   생명은 물에서 태어나 물로 돌아간다고 한다. 물은 대지보다도 앞서서 존재하였고 물은 탄생과 죽음을 모두 상징한다. 성서의 창세기 1장 2절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느라’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은 창조의 원형이 된다. 전통적으로 우물은 여성과 관련이 많고 생명의 탄생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첨성대를 조영한 신라 27대 선덕여왕 자신이 여성이고, 신라시조의 왕비인 알영부인도 역시 알영정에서 태어났고 신라시조인 박혁거세 왕 역시 나정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우물에 떠 있던 오이를 먹는다는 것은 생산의 잉태를 예고한다. 


딸은 차천으로 물을 길으러 갔을 때 오이 한 개가 있기에 집어 먹었더니 그 후부터 이상하게도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자기 몸이 깨끗함을 맹세하였다.


자기 몸이 깨끗함을 맹세하는 것으로 보아 딸은 여성으로서의 집단 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스스로도 모르게 존재하는 무의식에 주목한 융은 인간의식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무의식을 알지 못하고서는 인간 자체인 자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우거진 수풀 사이를 더듬어서 정자나무 밑에까지 와보니 희고 큰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한 쪽 날개를 아기에게 깔아주고 또 한 쪽 날개로는 그것을 덮어서 보호하고 있었다.


희고 큰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도와주는 것은 영웅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큰 인물이 탄생함을 예고하는 영웅패턴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 곧 아기를 데리고 와서 기를 수 없으므로 어떻게 하면 버젓이 기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밤낮으로 생각하였다. 여러 가지로 의논한 결과 그들 내외는 능주에 사는 친척 집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수풀 속에서 어린 아이를 주워 왔다고 꾸미는 것이었다.

-중략-

이것을 본 여러 사람들은 크게 놀랐으나, 배 이방의 내외도 같이 놀란 시늉을 하면서 어떤 몹쓸 사람이 이런 곳에 아기를 내다 버렸을까 하고 욕을 하면서 우리는 자식이 없으니까 데려다가 길러 보자, 하고 그 아기를 안앗다. 여러 사람들은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찬성하였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한 체면을 유지하거나 규범적 인간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상황에 맞는 가면을 착용하는데 바로 페르조나다. 이를 두고 이중적 의식구조이며 몰개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집단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속성상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간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페르조나를 적절히 이용하기만 하면 타인과의 유연한 상호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페르조나를 부정적으로 여길 것만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자아와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는데 신경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텍스트의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나 ‘어린 아이를 주워 왔다고 꾸미는 것’은 환경에 의해 집단적으로 형성된 체면의 페르조나 사용이다. ‘이방의 내외도 같이 놀란 시늉을 하면서’나 ‘욕을 하면서’는 인간이 집단과의 관계를 유지하면 그 집단의 정신에 동화되게 되고 결국 집단이 요구하는 역할에 충실히 맞추게 되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집단이 지닌 정서의 잣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또 욕을 하는 행위는 자신의 그림자가 투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그림자가 타인에게 투사될 때 이 투사는 곧잘 자아와 비슷한 대상에로 향하기 때문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식이 된다.


3. 결론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 이론은 그것이 매우 야심적이라고 할 만큼 새로운 학설이었으며, 인간의 심리분석 뿐 아니라 문학작품의 이해와 감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무의식 이론의 적용은 문학연구를 역사적이거나 미학적인 영역을 넘어서게 한다. 따라서 원형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제식이라든지 신념의 근원으로,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까지 연구의 손길을 뻗는다. 

   민간전설인 「차천의 오이」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며 짧고 쉬운 내용 속에 잠재하는 인간의 내면을살필 수 있었다. 어느 인류, 어느 종족에게든지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인물상이나 정형적인 행동방식이 있다. 이는 단지 문학의 전통적인 수법이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깊은 심리 속에 뿌리박고 있는 원형상의 반영이기 때문에 논리를 초월하여 독자에게 강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문학접근법에 대한 지나친 편향적 신뢰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심리학적 분석이 주는 새로움과 신선함의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다른 가치 있는 접근 방법과의 결합을 통해 문학작품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프로이트를 신봉하던 비평가들이 성적 상징에 대한 열정 때문에 훌륭한 문학적 가치에 대한 바른 시야를 상실하듯이, 이러한 오용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작품의 이해와 분석을 해 나갈 때, 바람직한 문학연구가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