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논문

백석시에 대하여

아침햇살로만 2007. 10. 8. 14:53

 

                                                은은히 빛나는 별, 백석의 시

                                                   

1. 들어가며

작가의 작품 창조나 문학작품을 평가하는데 있어 시대상황이 끼치는 영향은 실로 크다. 시인 백석(1912 ~1963)이 작품 활동을 한 1930년대는 일제의 강압적 식민지정책이 극에 달해, 자율적인 문화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문학은 역사를 제재로 삼거나 대중적 애정을 다루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지향과 주지적 방향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월북작가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대상에 포함된 백석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그의 작품을 모은 「백석시선집(1987, 창작과 비평사)」도 출간되기에 이른다. 백석을 월북작가의 범주에 넣어온 것은 과오다. 해방 이후에 고향 평북 정주에 눌러 살아온 그는 고향을 떠난 것이지, 북을 이념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재북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용악이나 오장환 등의 작품과 함깨 해금조치를 받게 되는 1980년대 중반까지는 백석의 시는 이념적 억업에 따른 금기의 대상이었다. 해금과 함께 논의의 대상에 오르내리며며 비로소 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게 되었다. 

백석의 시는 통시적으로 큰 변화를 갖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특징은 상실한 고향에 대한 향수, 식욕으로 표현된 유년시절의 반추, 방언과 특유의 문체로 나타난다. 이를 일제의 수탈과 이로 인한 가족공동체의 해체가 불러일으킨 옛것에 대한 집착으로 보고 민중적 리얼리즘 시각에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제하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시에 드러난 민족의 삶의 모습을 사회적 관점에서 평가하기보다 시 자체의 서정성을 들여다보는 방법으로 살펴보려 한다. 


2. 작가소개

백석(1912 ~    )1)은 시인으로 본명은 백기행.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도쿄(東京)의 아오야마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34년 귀국,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였다. 39~45년에는 만주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시작활동을 하다 광복 직후 귀국, 고향인 정주에 정착하였다. 1935년 시「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그 뒤 시, 단편소설, 수필 등을 신문·잡지 지면에 다수 발표하였다. 실향의식을 노래한 향토색 짙은 서정시로 1930년대 한국문단에 반향을 일으켰으며, 유일한 시집으로는 『사슴(1936)』이 있다. 그러나 백석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80년대 들어와서야  높아지게 되고  작품을 모은 『백석시선집(1987)』이 출간되었다. 작품으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여우난곬족」,「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등이 있다.


3. 백석 시 감상

3.1. 고향에 대한 향수

1930년대의 문학작품에는 고향을 잃은 실향의식이 많이 나타난다. 나라를 빼앗긴 울분과  가족해체, 유랑민의 애환이 주제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참담한 현실을 잊기 위해 과거는 실제보다 미화되거나 과장되어 회상되기가 싶다.

그러나 백석의 시에서의 화자는 고달픈 현실을 잊기 위하여 과거를 떠올리기보다는 순진무구한 유년의 감각이 되어 그 시절을 느낄 뿐이다. 시 「고야」에서는 시제를 현재형으로 나열해가며 동화적인 분위기에 몰입해간다. 시를 읽는 독자는 생생하게 전달되어 오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시를 통해 유년시절로 회귀하려는 백석의 시도는 해체된 대가족주의와 고향이 가지고 있는 질서를 확인하자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향을 느끼며 민족의 유대감을 끈끈하게 맺어가자는 것이다.


3.2. 적막한 식욕이 불러일으키는 것

상실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음식물이 제공하는 위로의 측면은 큰 편이다. 백석 시에 나타난 음식물은 감각을 통해 순간적으로나마 옛 시절의 어린마당으로 데려간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를 통해 나타난 음식 종류를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시케, 산적, 나물지짐, 무이징게국, 따끈한 감주, 찹쌀 탁주, 곰국, 돌나물김치, 백설기, 콩가루 차떡, 제비꼬리, 막써레기, 마타리, 쇠조지, 시껍은 맨모밀국수, 명태창난젓, 돗바늘 가튼 털이 드믄드믄 백인 도야지고기,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물구지 동굴네우림, 조개송편, 죈두기 송편, 밤소, 팥소, 설탕든 콩가루소, 무감자. 시라리타래, 개구리 뒷다리, 추탕, 엿, 송이버섯, 옥수수, 산나물, 노루고기, 김, 소라. 굴, 미역, 석박디, 김치가재미, 밤참국수, 기장쌀, 기장차떡, 메밀가루, 떡, 콩기름, 귀이리차, 대구국, 뻑꾹채, 약물, 깨죽, 문주, 송구떡, 백중물, 붕어곰, 청각, 은행여름, 털도 안 뽑은 도야지고기, 한꿩고기, 인소탕, 떡국 등등 148종이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백석의 시에서는 토속적인 음식물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음식물 명칭이 구체적이고 서민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이 모든 음식의 맛을 백석이 경험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가 곧 음식으로 나타난 것이며, 그 음식을 만든 따뜻한 손길에 대한 그리움과 그 음식을 함께 나누던 가족과의 한 때의 단란함을 반추하며 쓸쓸함을 이겨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3.3. 방언과 문체가 주는 개성

1930년대 활동 시인 중에서 언어 조탁의 대가인 김영랑이나, 세련되고 주지적인 언어구사를 보인 정지용과 달리 백석의 시에는 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지방의 방언이 생생하게 나타나있다. 이로 인해 시가 덜 다듬어지고 세련미가 없다고 여길 수 있겠으나 질박함에서 오는 편안함과 순수함이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가게 만든다. 따라서 그가 모국어를 얼마나 사랑하고 꾸밈없는 자연미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난 방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쇠메�, 즘생, 깽제미, 당즈께, 아르대즘퍼리, 뒤우란,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엄매, 아배, 말쿠지, 숨국막질, 아르간, 쌈박이, 덩밥새, 집난이, 입내, 노나리군, 날기멍석, 내빌날, 배빌눈, 갑피기, 오리치, 동비탈, 동말랭이, 매지, 돌덜구, 시라리타래, 잘버들치, 엄지, 하누바람, 노큰마니, 회채리, 싸리갱이, 갓진창, 게산이, 뜯게조바, 뵈짜배기, 오쟁이, 끼애리, 녕동이, 강쟁빈, 산모퉁고지, 들고지방, 외얏맹건, 양지귀, 능달쪽, 산녑, 은댕이, 에데가리밭, 산멍이, 집등생리, 아르굴, 개포, 뿔다구, 왕광이, 막베등거리, 막베잠방등에, 자박수염, 돌능와집, 햇츨방석, 따디기, 하로진일, 에동들, 딜웅배기, 북덕불 등이 있다.2)

또 금덤판, 닉은 동치미국, 석박디, 데석님, 디운구신, 녀귀에서 볼 수 있듯이 구개음화를 시키지 않은 구어체를 사용하여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하고 있다. 시의 형식면에서는 줄글(산문)형식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로 인해 함축보다는 서사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4. 결론

해금조치대상에 속할 시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로인해 백석의 시가 대중화되거나 연구가 활발히 이루지게 된 것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백석의 시를 통해 고향에 대한 향수, 그 연장선상에서의 적막한 식욕의 상징, 평안도 방언과 독특한 문체가 주는 개성을 살펴보았다.

백석이 1930년대라는 우리민족의 암울한 시대에 창작활동을 하였으나 그의 시를 역사적 관점에서 논의하기보다는 서정적인 시자체로 읽어보고자 했다. 그의 시에서 일제의 지배를 암시하는 구절과 같은 민족적 색채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백석의 시에서 읽을 수 있었던 비애는 사회적 현실을 문제 삼고 있다기보다 인간의 본원적인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백석의 시를 통해 이질적이면서도 친근한 평안도 지방의 방언을 살펴보았다. 산문형식의 시가 품고 있는 서사성, 독해의 평이함, 문체가 주는 개성에서는 독특한 매력이 느껴졌다. 꾸미지 않은 순수가 주는 감동의 울림이 다듬은 것보다 크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큰 수확이다. 전위예술이 앞선 것이라는 인식을 주는 현시대에 백석의 시들은 은은히 빛나는 별과 같다.